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효 에세이 입상작] 효자효녀상, 뒤늦게 불러보는 사모곡

'5월' '엄마' '카네이션' 단어는 나의 온 몸의 세포가 하늘에 계신 당신을 향한 그리움과 사무침으로 몸부림치게 합니다. 23년전 막내인 제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왔을 때 엄마는 저랑 뒷모습이 비슷한 단발머리 여대생만 보면 넋을 잃고 뒤를 쫓아 갔다지요. 막내인 제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랑 저는 학교 다닐 때 장난처럼 결혼도 하지 말고 엄마랑 같이 끝까지 살겠노라고 약속까지 했었는데 엄마는 내가 대학 졸업하자 마자 혼기라도 놓칠까 봐 이리저리 분주히 사윗감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던 엄마는 항상 옆에 끼고 있고 싶어했던 딸이 결혼해서 미국으로 오게 되니까 눈에 밟혀서 틈만 나면 딸이 타고 간 하늘만 쳐다봤대요. 비행기만 날아도 비행기가 하늘 끝까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고 뒷모습이 비슷한 여대생이라도 보시면 정신없이 쫓아가다 걸음을 되돌리곤 하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전해 들었어요. 그런 엄마를 저 역시 이 미국 땅에서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워 했는지 어느 날 모 회사 화장품에서 엄마의 체취를 맡고 밀려오는 그리움에 목 놓아 울었답니다. 엄마! 저 이 편지 쓰면서 갑자기 또 눈물이 앞을 가려 글을 못 쓰게 합니다. 뜨거운 눈물요. 엄마는 저의 정신적 지주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노년에 낳으신 늦둥이인 저와 세대차가 없으실 정도로 저의 눈높이에서 저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웃에게도요. 해질 무렵 과일을 다 못 팔고 리어카를 돌리시는 과일 장수 아저씨에겐 엄마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어려우면 온 집안 식구들이 힘들 거라고 못 다 판 과일을 마지막에 다 사주셨던 우리 엄마. 그러던 엄마를 미국에 사는 이유로 생활이 바쁜 핑계로 나에게 하나의 가정이 생겼다는 변명으로 엄마를 가까이서 모시지 못함에 이 모든 것이 한으로 맺혀옵니다. 미국으로 방문 오실 때 이민 가방 4개를 아버지 2개 엄마 2개 들고 오셨던 것. 그릇 세트를 이불이며 옷가지 수건 속옷에 차곡차곡 쌓고 쌓아서 하나도 깨어지지 않게 싸오셨던 것. 지금까지도 그 그릇 수건 속옷을 쓰고 입고 있습니다. 사실 새 그릇으로 바꿔쓰고 싶어도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묻어 있고 배어 있기에 감히 바꿀 생각조차 못하고 있지요. 어느 날 지병으로 인해 몸져 누우셨는데 달려가서 간호를 해야하는 데 제가 모시지도 못하고 간호도 못했어요. 미국에서 쉽게 나간다는 게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한국에 언니 오빠가 계셨지만 엄마와 제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저녁마다 전화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꿈 속에서 엄마를 뵙고 일어났는데 빨리 한국을 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오빠 언니들한테 전화를 했는데 괜찮다고 제가 너무 민감한 것 같다고 했지만 전 마지막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급하게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비행기에 탑승하자 마자 캡틴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바로 내릴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습니다. 1분 1초가 화급을 다투는 듯 했습니다. 마음의 초조함을 이루 말할 수 없고 나는 비행기 안에 저 또한 엄마를 향해 날고 있었습니다. 공항에 내려 부산으로 옮겨타야 되는데 비행기를 놓칠 것 같아 내 짐을 포기하고 바로 부산행 비행기로 갈아타서 공항에 내렸는데 나의 서둘렀던 그 마음과는 달리 마중나온 오빠 언니는 너무 태연했습니다. 엄마는 괜찮은데 왜 그렇게 허둥지둥 정신을 못차리느냐고…. 하지만 난 한사코 빨리 서둘러 집에 데려다 달라고 재촉했고 오빠는 절 내려 주고 오빠 집으로 갔는데 엄마는 제가 오길 기다리고 계셨나 봅니다. 제가 "엄마"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엄마는 그 때 이미 눈을 감고 계셨는데 저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눈을 뜨시려고 애쓰셨습니다. 눈을 깜박이던 하얗고 온화하신 엄마의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엄마는 영원하신 생명의 나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모두가 괜찮다고 했던 순간에도 늦둥이 막내인 저에게는 빨리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5남매 중 막내인 제가 엄마의 임종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난 지금 엄마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은 눈물 없이는 못 부릅니다. 목이 메어 찬송 속에 묻어나는 엄마의 음성이 너무 그리워서. 엄마가 읽으시던 성경에 그은 빨간 줄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 번 더 눈이 머무릅니다. 엄마의 삶과 정신이 머물러 있기에…. 엄마! 하늘에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빨간 카네이션 대신 흰 카네이션을 당신께 드립니다. 뭉게 뭉게 솟아나는 그리움과 함께. 막내 딸 진희가

2009-07-10

[효 에세이 입상작] 효자효녀상, 그게 잘 안되네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보았다.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 요사이 참으로 날씨가 좋다. 이렇게 좋은…. 내색하지 않는 아빠 엄마는 지금 어두운 회색빛 하늘과 땔감 없는 아궁이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막막한 마음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올 해 초 형부가 폐 쪽에 이상이 발견돼 조사해본 결과 선암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빠 엄마는 가진 것 없어도 식구 모두 건강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줘서 고맙다고 하셨었는데 이 일은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우리 세 딸과 사위들 그리고 막내 아들은 아빠 엄마의 재산이자 자랑거리요 삶의 이유란 걸 너무도 잘 아는 나는 이 일로 세상에 태어나 아빠가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주 아주 어릴 적 친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크게 우셨던 건 생각나지만 아빠는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담배만 피시던 생각만 날 뿐 이렇게 목까지 메여 끝까지 말씀도 다 못하시고 우시는건 처음이셨다. 특별히 딸들에게 더 다정다감하신 우리 아빠…. 남들은 40살도 넘은 내가 아빠라고 부르면 아버지라고 물러야 된다고 하지만 나는 '아빠'라는 단어가 훨씬 좋다. 내 어릴 적 아빠는 학교가는 세 딸의 머리를 직접 물 묻혀가며 이쁘게 빗겨 주시고 색 곱고 좋은 옷감을 직접 사와 엄마에게 아이들 원피스를 만들어 입히라고 하시고는 올망졸망한 그 어린 딸들을 데리고 어디든 다니셨다. 아이들이 넷이나 있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엄마는 또 이런 일을 만들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손에는 이미 줄자가 들려 있었고 천천히 만들어 입혀도 되었을텐데 밤이 늦도록 옷을 만들어 금세 입히셨다. 똑같은 옷 똑같은 머리를 하고 그렇게 셋이서 거리를 걸어가면 사람들이 "어휴 이쁘네 귀엽네" 한 마디씩 했다. 그럴 땐 아빠는 "제 딸들이에요"라고 하시며 너무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항상 첫 마디를 "걱정하지 마"로 시작하셨는데 나는 그 말 그대로 별 걱정하지 않고 자랐고 공부를 못해도 주사맞기 무서워 집으로 도망쳐와도 남의 집 유리창 문을 깨뜨려도 아빠는 항상 "걱정하지마 어디 아픈 것보다 훨씬 낫다"라고 하셨다. 언니가 시집갈 때 오른팔이 잘라진 것처럼 아프고 허전하다 하셨고 막내딸 시집갈 땐 이젠 집이 텅비었네라고 하셨지만 아마 맘이 텅 비었다는 뜻이었을거다. 둘째인 내가 시집갔을 땐 뭐라셨을까…. 어쩌다 딸 셋이 놀러와 엄마와 거실에 앉아 조잘조잘거리며 무엇 때문인지 히히 호호 하하 떠들면 부엌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계셔서 우리들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하셨을 것 같은 아빠 얼굴에도 살며시 웃음이 번지는 걸 나는 매번 보곤 했었다. 시집간 딸들이 이틀 삼일 전화가 없으면 엄마에게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 한 게 있느냐 또는 아이들과 싸웠냐 하시며 괜한 엄마를 잡는다고 하신다. 그리곤 곧바로 내 회사로 오셔서 "그냥 지나다 왔다. 니 얼굴 좀 보자" 하신다. 아빠는 심장으로 인한 마비가 벌써 두 번이나 왔었고 작년엔 심장 수술을 하셔서 온 식구들이 난리도 아니었는데 여전히 금기인 담배를 피우신다. "아빠 제발 담배 끊어야 돼!" 하며 난 곱게 눈을 흘긴다. 그러면 아빠는 "난 담배가 니 엄마보다도 좋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으신다. 요사이 부쩍 여위고 진짜로 할아버지 얼굴이 되어버린 나의 아빠…. 손과 얼굴에 쭈글쭈글 주름살이 정말 요샛말로 장난 아니다 싶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전에 없었던 한숨을 자주 쉬시며 차라리 살 만큼 산 내가 상호(형부이름) 몸에서 암을 가져와 대신 죽어주고 싶다며 눈물을 삼키시는 나의 하나뿐인 아빠. 아빠… 가끔씩 아빠를 안아드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아빠… 가끔씩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은게 그게 잘 안되네요. 아빠… 가끔씩 걱정 마시라고 위로해 드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아빠… 가끔씩 우리 곁에 오래 오래 있어달라 말씀 드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 아빠… 가끔씩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아빠… 아빠… 너.무.너.무.사.랑.해.요. 오늘도 여전히 아빠는 손자 손녀들에게 "걱정하지마 할아버지가 다 해줄게. 다치나 아프면 안 돼! 그게 제일 나쁜 거야" 하신다.

2009-07-10

[효 에세이 입상작] 효부상, 못다한 며느리 노릇 내년엔 꼭···

보고 싶은 어머니 아버지께 LA는 지금 막 여름 더위가 시작되었어요. 그렇지만 곳곳에 형형색색 아름다운 고운 빛깔의 꽃들이 무더위를 잊게 해줍니다. 대구도 지금쯤 많이 덥겠지요. "아이구 디다"하시면서 가게에서 장사하고 계시겠네요. 많이 더워서 고생이 많으시죠. 장사도 안 되서 힘드신데. 죄송해요. 저희가 미국에 있어서 도와 드리지도 못하고…. 제가 어머니 아버지의 며느리가 된 지도 벌써 7년이 흘렀네요. 정말 세월이 빠르네요. 제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진이가 6살 용선이가 4살이네요. 아이들 많이 보고 싶으시죠. 내년에 진이 아빠가 한국으로 꼭 발령이 나서 그동안 못한 며느리 노릇 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편지를 드리니까 제가 젤 첨 두 분께 원재씨랑 두려운 맘으로 인사 드리러 가던 날이 생각나네요. 미국에서 오래 자랐고 저희 집안 교육자 집안이라 장사하시며 오래 살아오신 두 분의 아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반대하시려고 했는데 절 보시고 며느리 삼으면 정말 좋겠다고 좋게 보아주셔서 아버님이 절 보시고 대뜸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애를 낳냐고 원재 씨한테 절 데리고 단골 한약방 가서 약 한 재 먹이라고 하셨죠. 전 너무 당황하고 부담스러워서 솔직히 두 분이 그땐 좀 이상했어요. 제 의향은 무시하시고 그냥 며느리 취급을 하셔서…. 어쨌든 얼떨결에 결혼 날짜를 등 떠밀려 잡고 아버님은 대구 시내 아시는 분 모두에게 절 데리고 다니시면서 미국에서 우리 아들이랑 결혼하러 온 예쁜 며느리라고 자랑하시며 다니셨죠.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죠. 결혼식 전날 아버님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셔서 결혼을 연기할 수는 없어서 아버님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외아들 결혼식에 참석 못 하셨죠. 결국 눈물의 결혼식을 올리고 식이 끝나자 마자 아버지 뵈러 응급실로 달려갔죠. 그런 우리 두 사람에게 어머니는 신혼 여행을 못 가서 어떡하냐고 걱정하시고 아버님이 빨리 의식을 되찾도록 우리 모두는 눈물로 기도했죠. 다행히 하나님이 아버지를 예전처럼 건강하게 해주셨죠. 전 아버지가 의식 찾으셔서 저의 손을 잡고 하신 그 말씀 평생 못 잊을 거에요. "아가 미안하다. 내가 주책없이 좋은 일 앞두고 맘 고생하게 해주었네. 너 결혼식 못 봤으니까 내년에 손주 하나 낳고 또 한 번 예식 올리자"하셨죠. 결국 예식은 다시 올리지 못하고 남편이 절 따라 미국에 왔지만 용선이 돌은 성대하게 했죠. 아버님이 그렇게 기다리시던 손자 손녀를 안겨드려서 조금이나마 며느리 역할 한 것 같아 위안 삼았어요. 어머니 아버지 내년에 꼭 한국에 가서 며느리 노릇 반에 반이라도 그동안 못한 것 해드리고 싶어요. 며느리가 아닌 딸로 늘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저도 두 분 시부모님이 아닌 정말 저희 부모님처럼 평생 사랑하며 살게요. 내년에 뵐 때까지 건강 챙기시고요. 장사에 너무 힘쓰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저의 시부모님이 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평생토록…. 어머니 아버지의 딸 에스더 올림

2009-07-05

[효 에세이 입상작] 효부상, 제 자식 키워 보니 알 것 같아요

그리운 어머님께. 어머님 그동안 무고하신지요. 저는 미국에 있는 셋째에요. 며칠 전에 제가 꿈을 꾸었는데 어머님께서 배가 아시다며 누우셔서 배를 문지르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깨고 난 뒤 지금 어머님께서 아프신데 자식이 모르고 있는건가 싶어 얼른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님께서는 마침 아가씨 댁에 가셨다며 전에 넘어지신 다리가 아프셔서 그렇지 다른 곳은 괜찮으시다고 하셔서 조금 마음이 놓였답니다. 어머님 85세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사시는 우리 어머님. 그저 젊어서는 없는 집에 그 작은 체구로 시동생 두 분 결혼 안 하신 아주버님 남자들만 계신 집에 시집오셔서 자식 8남매를 낳으시고 고생만 하시며 사시던 어머님. 지금은 몸이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으시면서 자손 마음 상할까 내색도 안하시는 어머님.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시지 않으셔도 혼자서 글을 깨우치셔서 성경을 읽으실 때는 한이 서린 듯 비슷하게 노래하듯이 읽으시면 듣고 있는 저희도 지루하지 않게 하시던 어머님. 저희가 일찍 이민 와 어머님하고 같이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데 어머님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목이 메여 오는지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 저희 집에 오셔서 1년을 사시던 그 시간이 저와 가장 긴 시간을 같이 하신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일한답시고 아침에 나와서 저녁에나 들어가는 며느리에게 행여 배가 고플까봐 어머님께서는 맛있는 된장찌개를 시골맛 그대로 조금이라도 힘든 며느리에게 오자마자 밥술이라도 뜨게 하시려고 준비해놓고 기다려 주시던 어머님. 그 맛이 어찌 그리 맛있었는지요. 지금도 어머님께서 해주시던 그 맛이 그립습니다. 제가 하면 그맛이 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자식을 사랑하시는 어머님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자식을 키워보니 어머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기간이 다 되어 가신 다음에는 좀 더 잘해 드릴 것을 후회가 많이 되었는데 어머님께서는 한국에 가셔서 저와 같이 사시고 싶으시다고 저와 같이 사시는 게 마음이 편하시다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들었을 때는 잘 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죄송하고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분도 좋았습니다. 지금은 너나 나나 때가 어려워 부부싸움도 잦다는데 저희 부부도 다투는 때가 전보다 많아졌습니다. 아범이 밉다가도 어머님 생각하면 조금 덜 미워진답니다. 어머님 저와 사시고 싶으시다고요. 저도 어머님과 같이 살고 싶어요. 제가 아이들 키워놓고 한국에 나가서 살 생각인데 그때 같이 살아요. 그래도 어머님께서 8남매 자식 중에 저를 지목해 주신거 감사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부모와 같이 사는 거 싫어한다지만 저는 어머님이랑 같이 사는 거 항상 어머님께서 저희 곁에 계시는게 아니잖아요. 연세도 있으시고 그래서 사사는 동안 저도 어머님과 함께 살고 추억도 역사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어머님께서 저를 기다려주셔야 해요.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셔서 저와 같이 사는 날에 제가 어머님 모시고 여기 저기 같이 구경도 해요. 아무쪼록 어머님 사시는 날까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 드립니다. 어머님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어머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미국에서 셋째 올림

2009-07-05

[효 에세이 입상작] 효자효녀상, 태평양 건너 꿈 속에서라도

이 캠페인에서 입상한 작품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기침 가래로 힘겨워하는 막둥이를 보듬어 안고서 집 앞 화단에 우뚝 서있는 사철나무 앞에서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우리 지현이 아프지 말고 커그래이. 4계절 푸른 이 사철나무처럼 파릇파릇 건강하게 자라그래이…." 30여년전 내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아버지 보셔요. 산 넘고 바다 건너 13시간을 날아온 이 곳 미국땅에도 고향집 사철나무가 버젓이 숨쉬고 있네요. 광기어린 더위를 이겨내고 생명줄 다한 나뭇잎이 옷을 갈아입는 가을을 비껴 눈보라 휘몰아치는 매서운 겨울도 거뜬히 맞서 사계절 한결같이 초록을 뿜어내는 튼튼한 사철나무를 보면서 내 부모님은 얼마나 가슴아파 하셨을까? 야위어가는 딸 자식을 가슴에 품고 마음 졸였을 부모님의 애절함을 어미가 된 지금에야 감히 헤아려 봅니다. 유난히도 몸이 허약했던 어린시절! 딸 자식의 생명줄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키기 위해 약초를 캐느라 아버지는 팔자에도 없는 산지기가 되셨습니다. 운이 좋은 날엔 거무튀튀한 빛깔의 손바닥 만한 영지 버섯을 보물처럼 안고 오시기도 하셨조. 읍내 시장에 내다팔면 우리 다섯 식구 한동안 양식걱정이라도 덜 것을. "우리 배 채우자고 이 어린 것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데이" 하시면서 엷은 햇살 골라 정성스레 말리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담배 한 개피 허락치 않으시고 말린 묵은 누런 종이에 둘둘 말아 버꿈버꿈 태우곤 하셨습니다. "에미야 니가 자식 낳고 사는 모습 보니까 이제 우린 죽어도 여한이 없데이." 안쓰럽던 여식이 출가해 무사히 자식을 낳았다는 소식에 그토록 좋아하셨는데…. 무릎팍에 오롯이 새끼들 둘러 앉혀 놓으시고 옛날 얘기 들려주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 하셨는데…. 그 소망 지켜드리지 못하고 태평양을 건너오고 말았습니다. 거듭되는 가뭄과 홍수에 흉작이 된 농작물 갈아 엎으시면서도 쓴 소주 몇 잔으로 괴로움 달래시더니 바다 건너 먼 길 떠나는 여식 앞에서는 끝내 돌아서서 눈물을 쏟고야 마셨죠. 뒤늦게 애기 기저귀 가방 깊숙한 곳에서 꼬깃꼬깃 접어 찔러주신 지폐를 보고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흐느꼈는지 모릅니다. "성공해서 엄마 아버지 꼭 호강시켜 드릴께요." 하지만 이민 생활이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네요.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부모님 생각은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가도 오늘처럼 이렇게 아이가 아프다던지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다시 간절하니 저는 어쩔 수 없는 불효자인 것 같습니다. 어쩌다 보낸 편지 한 장을 수십번 보고 또 보고 가슴팍에 얹고 잠드신다는 동생의 얘기에 목구멍이 울컥해졌습니다. 나중에 큰 것 대단한 것 해드리기보다는 바로 지금 현재 위치에서 정성스레 쓴 편지 한 통 안부전화 한 통이 진정으로 내 부모님이 바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나중에 우리가 성공하면 꼭 호강시켜 드려야지" 마음은 늘 한결같지만 불효 여식의 성공이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듯 세월 역시 두 분을 기다리지 않음을 이제사 터득했습니다. 호호백발 눈 앞에 둔 불쌍하신 우리 부모님! 오늘 밤엔 고운 날개 옷 입고 태평양 건너 꿈 속에라도 찾아뵙고 싶습니다. 부디 건강하고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2009-07-05

[사고] 가정의 달 '효' 캠페인…공경마음 담은 에세이 콘테스트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잊고 지냈던 ‘가족’의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 아버지가 새삼 그립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 집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중앙일보와 산하 미주한인봉사단(KAVC)이 가정의 달을 맞아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건강상품 기업인 ‘나노웰’과 함께 ‘2009 효 에세이 캠페인’을 실시합니다. 이번 행사는 미국땅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부모님들에 대한 자녀들의 사랑과 공경의 마음을 에세이로 적어 널리 알리려는 취지로 열립니다. 이번 행사 참가자 전원에게는 중앙일보에서 가족사진 촬영권을 무료로 제공하며 에세이 심사를 통해 15작품을 뽑아 입상자들에게는 푸짐한 상품을 드립니다. 중앙일보와 ‘나노웰’이 펼치는 이번 행사를 통해 더욱 행복하고 사랑 가득한 가정의 달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에세이 접수 마감: 5월29일(금) ▷신청 방법: 레터지 2~3매 분량 사연 및 사진 자료 첨부 ▷입상자 발표: 6월15일(월)자 중앙일보 지면 ▷시상: 효부상 2명, 효자상 3명, 특별상 10명 (총 15명) ▷사연 접수처: 중앙일보 사업국 ‘효 에세이’ 담당자앞(주소 690 Wilshire Place. LA., CA 90005) ▷주최: 나노웰 ▷주관: 중앙일보 미주한인봉사단 ▷문의: (213)368-2562

2009-05-0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